낙서01-에로스론

누드, 포르노그래피

카르미나 2017. 3. 25. 22:26



예술의 역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고찰하고 반추하는, 즉 존재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벌거 벗은' 누드는  가식이나 꾸밈이 없는, 그래서 진짜이며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인간이라 할수도 잇을 것이다. 그래서 누드에 예술, 혹은 예술적이라는 부가어를 덧붙이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대해 논란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누드 예술, 혹은 예술적 누드 (명칭이야 아무렴 어떤가! 각설하고)의 역사는 그 핵심이 바로 이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인간이 예술적으로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 과연 스스로가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아무런 제한 없이 전적으로 말이다!


 원래 예술 (Fine Art)이라고 할 때, 이 아트라는 말은 라틴어로 악투스(Actus), 즉 행동, 움직임(유동성)을 의미한다. 실제로 조형 예술분야에서 끊임없이 소생하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이 움짐임, 즉 드러나지는 않지만 재현된 대상이 환기하거나 함축하는 생동감 내지는 힘을 재현하는 문제다. 인간의 육체를 재현한다고 할 때 우리는 정체된 대상으로서 육체를 재현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육체는 움직임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비가시적이고 불가능한어떤 것이다. 모든 예술은 어떤 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픽셀로 무장한 난무하는 이미지, 영화나 비디오를 보면 고정되고 정체된 이미지의 홍수 말고는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누드는 예술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하나의 정체되어 있고 정지된 움직임을 재현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 감추어진 생동감과 힘을 환기하려고 시도해왔다. 누드 예술에 있어서 인체가 취하는 포즈는 언제나 나체라는 사실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다행스럽게도 사진과 결합한 누드가 날것 그대로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무차별적 재현으로 전락의 길에 접어들 무렵 우리는 한 천재를 만나게 된다. 시대의 흐름상 과장이나 왜곡 없이 인간의 육체를 재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오직 날것 그대로의 육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주류로 위세를 발휘하던 시점에서 예술은 다시 한 번 이 주류의 현실을 거부한다. 1907년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차후로 누드는 더 이상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재현되지 않게 되었다. 원시 예술의 재발견,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무의식의 등장, 예전과는 달리 재현하려는 대상과 일치시킬 필요가 없어진 색체와 표현 기법이 가진 본질적인 내재적 가치들 그리고 정확성을 기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진 기술의 충격적인 발전이 누드에 관한 새로운 전망을 열었다.



오늘 날, 예술가들은 자연을 이상적인 완벽한 형태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롭다. 물론 아직도 여전히 누드라는 주제를 초상화처럼 다루려는 화가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감추어진 비밀스런 양상을 어떻게 형상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더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