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후 분석에 의해 애초 상태로 복원한 모나 리사
2.
라 조콩드 La Joconde, 혹은 모나 리사Mona Lisa의 초상화
(레오나르드 드 다빈치 Léonard de Vinci, 1503-1506 년경으로 추정.
백양나무 판자에 그린 유화, 77 × 53 cm, 루부르 소장)
라 조콩드는 아마도 확실히 다빈치의 작품으로 판명 난 몇 안되는 드문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거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예술가들이 하나의 지표로서 삼았던 까닭이다. 실제로 라 조콩드는 15세기 초상화 작법의 결정판이었던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예술가들은 이 작품의 신비로움에 매료되어서 이 작품을 둘러싼 ‘신화적 성격’를 더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오늘 날 라 조콩드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도록 한 원동력이다.
편력의 역사
다빈치는 1502년, 프로렌스(피렌체)에서 이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바사리에 따르면 4년 후에 이 작품을 완성 하였다고 한다. 다빈치의 생전에는 조콩드는 다른 누구에게도 간적이 없이 수중에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후일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가 다빈치를 앙부와즈 성으로 초대했을 때 다빈치는 이 작품을 지참하였던 것으로 간주 되는데, 여기서 프랑스와 1세가 다빈치로부터 직접, 혹은 그가 죽은 후 그의 후손들로부터 습득하였으리라 추정되며 그 이후 퐁텐느불로우 성으로 옮겨왔으리라 추정된다. 그 이후 국와으이 거주지가 루브르로 바뀜에 따라 루브르궁으로 옮겨 갔으며 다시 마찬가지 이유로 베르사이유 성으로 이전되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게한 그림 중 하나로 1650년 까지는 왕의 집무실에 걸어두었다. 그 이후 프랑스 혁명 후인 1798년, 박물관으로 바뀐 루브르로 옮겨졌으나 1800년 당시 통령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튈르리 궁으로 옮겨져 조세핀의 아파트에 전시하였다가 1804년 다시 루부르에 돌려 주었다.
라 조콩드는 1911년 8월 21일 도난당했다. 시인인 기욤므 아폴리네르와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가 이탈리아 작가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요구로 이 그림을 훔쳐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었다. - 개인적인 견해로는 아폴리네르는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피카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암튼 두 사람은 피카소가 아폴리네르에게 마리 로랑생이라는 여자를 소개시켜 줄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블러그의 미라보 다리 해설을 참조 바람). 두 예술가가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한 이유는 있었다. 피카소(당시의 그는 이제 막 전도 유먕한 예술가로 파리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폴란드 출신인 아폴리네르는 이미 파리의 저명 예술가였다) 가 아폴리네르의 비서로부터 조각품 2개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이 2개의 조각은 아마 - 내 기억이 맞다면- 아를르의 여인이라는 작품에 모티브를 제공한 것있으나. 피카소는 이것이 작물이라는 모르고 속아서 산 것이었다. 물론 헐 갑에 구입했다. 이를 안 두 사람은 경찰의 수소문이 강화되자 (당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비단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 유럽, 세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피카소는 이 조각상을 몰래 세느강에 버리려고 했으나 아폴리네르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피카소로서는 파리에서 추방당할 까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아폴리네르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풀려나긴 했으나 아폴리네르는 구치소에서 8일을 견더야 했다.
루브르 애호가 협회는 2만 오천 프랑의 보상금을 내 걸었고 한 익명의 독지가는 이 두 배의 상금을 약속했으며 이류스트라시옹 이라는 잡지는 이 그림을 잡지사로 가져오면 5만 프랑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범인은 이탈리아인인 빈첸초 페루지아였는데 그는 유리공으로서 루브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유리 안에 넣는 작업에 관여했었다. 그는 그림을 2년 동안이나 파리의 자기 방에 감춰 두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1913년 12월 10일 프로렌스의 골동품 상에게 팔겠다고 했는데 그 골동품상이 신고해버렸다. 2차 대전 중에는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앙브와즈 성, 그 이후에는 로크-디으 수도원을 거쳐서 몽또방의 엥그르 미술관을 옮겨 다녔다. 한 때는 루브르 박물관이 몽탈 드 케르시로 피난갔을 때 관장의 침대 아래 보관되기도 했다.
1963년 워싱통에 전시되어서 이 때 존 에프 케네디와 린든 존슨, 당시의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와 그 부인이 이 그림을 감상했다. 이후 워싱톤 디스트릭트 오브 컬럼비아의 내셔날 겔르리와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전체적으로 170만명이 이를 보기 위해 방문했다고 추산된다. 1974년에 일본과 러시아에 두 번 더 여행하였다.
2005년 부터는 특별히 모나 리사를 위해 개조한 방에 전시되어서 덜 유명한 그림인 베로네스의 ‘카나의 결혼’을 마주하고 전시되어있다.
그림 소개
라 조콩드는 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인데, 멀어보이는 안개 낀 지평선에 이어서 산을 뒷 배경으로하고 있다. 여인은 머리에는 투명한 검은 색 면포를 썼으며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당시의 유행에 맞게 완전히 털을 뽑아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은 눈썹도 속눈썹도 없다. 의자에 안자있는 형상이다. 화폭 오른 쪽에 의자의 등받이 부분이 보인다. 손은 겹쳐서 의자의 팔걸이 위에 살짝 얹어놓았다. 아마도 외랑(일종의 베란다) 에 있는 것 같다. 그녀 바로 뒤로 그러니까 그림의 첫 1/3 부분에 난간이 희미하게 보이고 왼편으로는 기둥의 볼록한 부분이 보인다. 뒷 배경으로는 산이 있으며 그 사이로 작은 길이 구불구불하게 나있으며 여러 개의 돌 다리가 가로지르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 지평선이 끊어져 있는데 이는 조콩드의 두 상이 화폭을 둘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광선은 화폭의 왼편으로부터 비추는 것 같다.
모델에 관하여
모델의 신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다.
리사 마리아 게라르디니
조루지오 바사리 이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가설에 따르면 모델은 원래 1479년 피렌체에서 태어난 리사 게라르디니 였다고 한다. 검소한 가문에서 태어나 16세에 포목점 주인의 아들인 프란체스토 디 바르톨로메오 델 조콩드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미 두 차례나 상처를 한 조콩드는 리사보다 19살이나 많았다. 리사는 1496년 피에르 프란체스코, 1499년 어려서 죽은 딸 하나, 1502년 태어난 안드레아 이렇게 세 아이를 낳았다. 프란체스코는 산티시마 아눈지아타 성당에 가족 채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도 후일 여기에 안장되었다.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 종복회 소유였는데 이 단체가 당시 이 단체를 위해서 일했던 공증인인 피에로 다빈치의 아들인 레오나르드를 기숙시키고 있었다. 당시에 프란체스코와 다빈치를 서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프란체스코는 후일 좀 더 큰 저택으로 이사하고 아내의 초상화를 그릴 화가를 수소문 하게 되었는데 결국 다빈치에게 부탁했다. 리사는 24살이었고 다빈치는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을 때 51살이었다. 프란체스코는 결국 이 그림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화가가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에 정착한 후에야 완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정에는 많은 의의가 제기되지만- 왜냐면 지불의 증거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빈치와 조콩드 가문의 관계는 2004년 기세페 팔란티에 의해서 확인 되었다. 팔란티에 따르면(2007년) 토스카나 지방 피렌체의 역사 도서관 성당 고문서에 프란체스코 델 조콩드의 부인의 사망 증명서가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1542년 7월 15일 사망, 산타 오르솔라 수도원에 묻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다니엘 아라스에 의하면 만일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프란체스코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그림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당시에 맨 이마르르 드러내거나 눈썹을 제거한 것은 창녀들이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에 이루어진 미세 분석에 의하면 화면의 조콩드 부인은 투명하거나 거의 보이지 않는 면포를 이마에 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 다른 가설
또 다른 가설에 의하면 이 이 초상화는 성전환한 자화상이라고도 한다,. 그 근거로는 다빈치의 크로키 화첩에 있는 얼굴 형상과 모나리사의 크로키가 겹쳐진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유츄일 뿐인데, 모나 리사의 얼굴 모습이 로렌조 디 크레디가 그린 포르리의 공녀인 스포사(15세기)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탈리아의 프로리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림 해설
제목
그림이 제목은 아마도 ‘델 조콩드“라는, 모델의 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시 재현된 여인의 형상 자체만을 그 모델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그림이 또한 ’모나리사Mona Lisa” 원래는 ‘모나리사 Monna Lisa"라고 제목을 정했다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모나리사는 ’마 돈나 리사“, 즉 ‘마담 리사 (내가 존경, 내지는 사모하는 부인)’ 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성
이탈리아어로 조콩드는 ‘행복’ 혹은 ‘차분함’을 의미한다. 다빈치는 필경, 이 그림을 그릴 때 비단 한 여인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 뿐 아니라 그림 자체가 하나의 어떤 관념의 표현이라는 것을 의식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라 조콩드는 침착하고 차분하고 평온한 어떤 존엄성을 느끼게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림에 드러난 초상이 팔에 아이를 껴안고 있는 형태라고 해서 라 조콩드는 여성성, 나아가서는 모성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미소와 시선
조콩드의 미소는 이 그림의 가장 불가해한 요소다. 이것이 이 그림의 신화에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녀의 미소는 말하자면 정지된 것처럼 즉 금방 ‘꺼져버릴’것 같은 미소이다. 화폭속의 모나리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주시하면서 동시에 관객위로, 그녀의 오른 편으로 약간 경사지게, 하나의 점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작품과 그를 주시하는 관객 사이에 깊은 대화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 비평가인 부뤼노 마통은 조콩드가 “당신안에 있는 어떤 것, 그러나 당신의 앞에 있지 않고 지나간 과거에 있는 어떤 것을 주시한다. 그녀는 마치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처럼 아가였던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한다.
* 모나 리사가 미술사에 끼친 영감과 그 변형 내지는 조소, 현대적 감각의 디지털 분석 결과에 대해서는 다음에 추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은 따로 저장해서 확대해 본다면 훨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카르미나
영감의 원천?
16세기부터 라 조콩드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 이들은 다소간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복사 내지는 모사 작품들을 남겼다. 코로, 로베르 드로네이, 페르낭 레게르 등이 여러 변형 작품들을 남겼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소위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은 ‘기존 예술’에 대한 항의로서 초현실주의 자들이 이 그림을 왜곡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살바도르 달리는 모나리자의 초상에 수염을 덧붙이기도 했으며 마르셀 드샹은 L.H.O.O.G라는 제목아래 입에 파이프를 물리기도 했다. 혹은 모터 사이클에 태우거나 개 , 인어 등으로 변형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모나리자로서는 생전에는 차마 꿈도 꾸어보지 못한 기묘한 여행을 한 셈이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조콩드 부인은 인기가 있는 편에 속했다. 바르바라, 세르쥬 겐스부르그, 파타슈 등이 조콩드를 소재로 곡을 만들어 불렀으며 장 마르가, 디지털 문학이라 할 수 있는 울리포 인 헤르베 르 테이에들은 문학적 인물로 변형시켰다.
보다 촤근에는 다니엘 드뤼에가 한 익명의 부자의 요청에 의해 모나리자의 거대 흉상을 점토 조각품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현 루부르 관장인 앙리 로이에트가 사들였다. 곧 모나리자의 프로필 조각이나 그림도 구경할 수 있는 날이 멀지는 않은 것 같다.
기법 분석
이 그림의 유연성은 스푸마토 기법 (안개와 같이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깔 사이의 윤곽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옮아가도록 하는 명암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 영국의 더 뉴우 사이언티스트 지는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포착하는 프로그램에 의거해서 분석을 내놓았는데, 이 연구에 따르면 모나리자는 행복 83%, 상심 9%, 두려움 6%, 화난 상태 2%로 밝혀졌다. 캐나다의 국립 연구소는 2006년 9월 26일, 오타와에서 3차원 연상과 복잡한 색체 레이저 분석기에 의해서 오나성한 연구 결과를 발표 했는데, 이 것이 모나리자가 면포를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첨부 사진 참조) 거의 투명하고 세밀한 이 면포는 당시에는 임신한 여인이나 갓 출산한 여인들이 정상적으로 사용하였던 풍습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 디테일은 이 때까지는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조콩드의 신비한 미소는 임신한 혹은 출산을 앞 둔 한 여인의 미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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