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아트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카르미나 2007. 1. 2. 21:25

                                                                                                                       <올렝피아, 1863>

 

 

 

                                                                                                                                     <프란시스 고야의 벗은 나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스의 비너스>

                                                                               

 

 

 

 

 

 

 

2. <올랭피아 l'olympia>

 

 

    그 이후로 마네는 더 이상 낙선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올랭피아>는 1863년에 완성되었다. 막 목욕을 하러 가려는 듯 하는 동방의 하렘의 한 창녀를 그린 작품인 만큼 논쟁은 더 격렬했다. 화폭은 백인 여자와 흑인 하녀간의 색체의 대조에서 오는 강렬함이 두드러진다. 사실 이는 매우 도식적인 아카데믹한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른바 노예를 대동한 오달리스크로서 1840년대의 엥그르나 베누빌, 혹은 자라베르 더 나아가서는 티치아노의 화폭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마네가 의도적으로 스캔들을 도발한 것도 있지만 몽매하고도 과도한 비평의 희생자였다. 이 시기에 친구인 보들레르의 격려와 우정이 마네가 인생의 가장 가파른 고갯길을 넘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었다.

 

 

 

***

 

무엇보다 먼저 올렝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로비노 비너스>를 보다 대담한 방식으로 모방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야의 <벌거벗은 처녀 maja desnuda>(97x190 cm)도 참조로 하고 있다. <올렝피아>의 모델도 우르비노스의 비너스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 디테일에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 우르비노스의 경우에는 얼굴이 정숙하고 순진한 얼굴이다. 개도 충실성의 상징이며 결혼 폐물함을 정리하는 두 하녀도 역시 정숙함의 상징일 수 있다. 반면 올렝피아의 얼굴은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잠재적인 관람객의 얼굴을 역으로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상당히 도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 손으로는 은밀한 부위를 가리고는 있지만 그녀는 억세고 활발한 모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요컨대 수줍음과 조용한 정숙함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에로틱하며 이는 다시 꼬리를 올리고 있는, 모델 옆에 위치시킨 검은 고양이에 의해서 강조된다. 고양이는 마네가 추가한 것인데 물론 유머러스한 효과를 생각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우르비노스의 그림에서의 충실한 개를 고양이로 바꾸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교활한(?)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어쩌면 개가 아니라 고양이가 갖는 은유적 의미에 의해서 모델인 젊은 처자가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부분을 환기시키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검은 고양이는 분명 남성적인 어떤 존재를 환기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은유는 하녀가 아마도 전해주는 꽃다발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어 진다. 요컨대 열정에 의한 사랑이 돈이 오고가는 사랑으로 변환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이 화폭은 제2제정시대의 매춘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묘사가 사실적인 만큼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주제는 날카롭다.

올렝피아이 거만하고도 불손하고 냉담한 성격은 제 2열에 방하녀의 얼굴을 벽과 같은 색으로 처리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하녀는 그녀가 받은 꽃다발을 올렝피아에게 가져다 줘야 하는 분명한 명분을 드러내고 있지만 당사자인 올렝피아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마치 관란객들(자신을 바라보는) 유혹하려는 듯 도발적이고 솔직한(?) 시선으로 마주보고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완전한 누드라는 것 외에도 모델(빅토린느 뫼랑)이 부정할 수 없이 도발적이고 불손한 면이 있다. 이 외에도 다른 몇가지 요소도 비평가들을 불편하게 했는 데, 생화가 아닌 꽃달발을 누드화에 올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약간 엉뚱한 발상이었으며 모랑에게 채운 팔찌는 화가의 어머니 것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전망을 생략(?()해버린 점도 이상하다면 이상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르비노스이 비너스와 비교해 볼때 화폭 전체에 걸쳐서 원근법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19세기에는 누드는 그 대상( 누드의 주인공)이 다른 시대에 속할 때에만 용인되었다. 이 그림에서는 모델은 매우 인칭화되어있다. 전통에 따르면 누드화의 모델은 대개의 경우 이상화된 비인칭적 성격으로 특징지어진다. 실제로 마네는 빅토린느의 짧은 다리, 작은 가슴, 각진 턱, 네모난 얼굴을 상세하게 그렸다. 이러한 인칭화는 이 누드가 갖는 일종의 경직성과 짝을 이루고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의 이 인물은 아무런 감수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부드러움이라던가 수줍음, 포기같은 감성은 드러나지 않고 대신 육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고 상상이 가능한 어떤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의미하려 한다.

 

 

   <풀밭위의 식사>와는 달리 <올렝피아>는 주제보다는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의해서 더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이른바 ‘현대성’을 촉발시킨, 이 화폭이 갖는 “파괴적인” 성격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폴 생 빅토르는 ‘마네씨가 만들어낸 부패한 올렝피아’ 라는 표현도 서슴치 않앗다.

 

 

 

 

 

3. 문학가들과의 우정

 

 

    아직 무명이었던 젊은 화가 시절부터 마네는 보를레르와 돈독한 우정을 맺어왔다. 둘은 1859년 마네 가문과 친분이 있던 르존느의 살롱에서 만났다. 물론 보들레르는 1863년 낙선 살롱전의 스캔들을 포함하여 마네를 공개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더 이 젊은 화가의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인 1865년, “[그(마네)에게는 약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확실한 무엇인가가 부족한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어쩌면 그것을 알아차린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보들레르와의 우정은 마네에게는 특별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올랭피아> 이후 비평가들의 신랄한 비난의 소나기에 답한, 당시에 뷔뤼셀에 머물던 보들레르의 답변의 편지는 확고하고 우정에 찬 것이었다. 답변 형식으로 보낸 이 기념비적인 편지에서 시인은 친구를 희생자로 삼는 비평을 그 시대의 다른 대가들이 받아왔던 비평에 견주어 상대화 시키면서 마네에게 자부심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심지어는 마네에게 결국은 그(마네)는 결국 [그의] 예술의 조락을 경험한 첫 번째 작가일 뿐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데카당한 주제에 매혹당한 대 시인의 입에서 나온 이 표현은 기실은 마네에 대한 비평가들을 비꼬는 것이며 마네에 대해서는 극찬에 해당되는 말이다. 1867년 보들레르의 때 이른 죽음은 마네와 그의 부인 수잔느에게는 강력한 보호자와 다정한 친구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가혹한 타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마네는 이 무렵 26세의 젊은 졸라의 지지를 얻는다. 에밀 졸라는 1866년 살롱이 <피리부는 소년>을 거절한 것에 격분해서 같은 해, 이 그림을 옹호하는 기사를 <에벤느몽> 지에 발표한다. 다음 해에는 화가의 그림을 매우 강력하고 굳건하다고 옹호하고 자연주의의 미학과도 연결시키면서 화가에 우호적인 비평과 전기를 기사화한다. 물론 오늘날 평가하기에는 이 모든 지지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젊은 작가는 이 전위 화가를 분명하고 명백하게 지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명성과 영광을 구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네는 이 젊은 친구의 우정을 언제나 고맙게 받아들였다.

 

 

 

   4. 후계자들과 노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네도 ‘공식적인’ 미학에 반대하는 일단의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추앙받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를 일컬어 비평가들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칸을 건너서 아이러니칼 하게 인상주의라 부르게 된다. 이 젊은 화가들의 일단은 기꺼이 마네에 접근하여 이른바 <바티뇰 >파를 형성하게 된다. 바티뇰은 마네의 아틀리에가 소재한 지역의 이름이다. 이 그룹의 일단으로 우리는 폴 세잔느, 오귀스트 르느와르, 프레데릭 바질, 그리고 클로드 모네를 꼽을 수 있다.

 

 

 

    에두아르 마네는 아마도 리오에서 감염된 이동성 운동실조 증으로 1883년 4월 30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병은 상당한 고통을 동반하는 데, 죽기 11일 전에는 탄저 때문에 왼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장례식은 1883년 5월 3일 파리 근교의 파시에서 열렸다. 에밀 졸라, 알프레드 스티븐스,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와 많은 지인들이 이승의 마지막 하직을 지켰다. 평생의 동지엿던 앙토넹 프루스트에 따르면 “꽃다발과 특히 많은 여성들”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고 한다. 드가는 마네를 가리켜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했다고 기록했다. 그 이후 바티뇰 구룹의 화가들에게 마네의 기억은 열렬한 찬사 속에 남게 되었으며 마네는 국제적으로 현대 회화에 가장 선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남긴 예술가로 인정되어진다. 2000년 마네의 어떤 작품은 2000만 달러 이상에 거래되었다.

 

 

                                                                                                    ㅡmemo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