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아트

미켈란젤로- 노예들

카르미나 2016. 8. 4. 02:38


                                                                    

                                                                                                                                                                             <죽어가는 노예>


 



                                                                                                                  <반항하는 노예>








<노예들 Les esclaves> de Michel-Ange : 구속당한 영혼인가?

 

 

 

     다음에 소개하는 일련의 조각 작품들은 미술사에서 지표가 될 만한 것들이다.

 


    1513년 미켈란젤로는 거의 누드 상태의 두 남성상 조각 작업에 착수한다. 이 두 개의 조각은 말하자면 시리즈로 잉태된 셈이었다. 애초에는 로마 성 베드로 상당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장식하기로 시작되었으나 교황이 죽은 후 경제적인 문제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그래서 로베르토 스트로치라는 플로렌스 출신 망명자에 의해서 프랑스로 건너오게 되었다. 리슐리외의 에쿠엥 저택에 있다가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망명 귀족의 재산으로 간주되어(압수됨) 결국 1794828일부터 루브르에 있게 되었다.

 

     주교의 후임자들과의 복잡한 갈등, 작업을 진행하는 중 만나게 되는 기술적인 문제등으로 조각은 교황의 무덤으로 가지는 못했다. 어떤 의미로는 미완성 상태는 <노예들>은 돌을 원대리석으로부터 떼어낼 때 생긴 정의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상호 보완이다. 작품은 아마도 르네상스 시기에 아마도 예술가를 곤혹스럽게 했던 내적 갈등을 엿보게 한다. 남성의 누드에 대한 예술가의 모호하지만 강한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이 조각상이 흥미로운 것은 이 시대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조각상에서 확인 하듯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감이라기보다는 이 조각의 상징성인데 문제는 상징성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혹자는 노예들이 문예 후원자였던 교황이 사망한 후 예술이 종속되어버린 것을 상징한다고도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이 정신에 장애가 되는 육체에 얽매있다는 플라톤의 관념과 같은 고대 철학에서 그 설명을 빌려 오기도 한다. 여기서 교황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읽기도 한다. 그 메시지가 무엇이던지 간에 메시지의 표현이 대리석위에 세심하게 조각된 것만은 분명 하며 두 노예의 대조에 의해 강조되어있다.


      <저항(혹은 반항)하는 노예>는 그 포즈로 보아서 무엇인가 알수 없는 어떤 힘에 붙잡혀있는 상태로부터 해방되고자하는 몸부림을 느끼게 한다. 무엇인가 뿌리치려고 하는 팔의 움직임이라던가 물리적 혹은 정치적 또는 미학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에너지를 얻으려고 받침대를 힘차게 도약하려는 오른쪽 다리에서 이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죽어가는 노예>상은 마치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 그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종속 상태에 있다는 믿음 속에 빠져있다. 그는 그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운명인양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는 똑바로 치켜든 머리와 부릅뜬 눈, 천으로 가려버린(보여줄 수 없으니 가려버인 것이다) 남성의 상징을 통해서 느끼는 것과 같이, 어떤 노력과 의지를 보여주는 남성적 근육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후자는 늘어뜨린 머리, 감은 눈, 포기해버린 남성의 상징이 말해주듯 소극적인 근육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후자는 중요한 부위가 누드 상태이다. 이것은 결핍된 상태의 존엄과도 연관지어 질 수 있다. 둘 다 자신이 처해있는 종속상태를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와 체념하며 수용하려는 방식으로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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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넘 더워 공부도 안되고 하니 시간 죽이기 위해서 작가에 대에 좀 더 덧붙여 보련다 .......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 3. 6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1564. 2. 18 로마)

 

미켈란젤로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왔다. 수많은 그의 회화·조각·건축 작품들은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그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조각가라고 여겼다. 그는 평생 대리석 조각에 몰두했으며 단지 일정 기간만 다른 분야의 예술작업을 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유명해진 또다른 이유는 그의 예술 생애에 대한 기록이 당시나 그 이전의 어느 예술가보다도 훨씬 풍부하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훌륭한 전기가 2편이나 출판된 최초의 예술가였다. 그중 하나는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 Lives of the Most E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1550)의 마지막 장으로, 이 장에서 바사리는 현존하는 예술가로서 유일하게 다룬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그 이전의 다른 모든 예술가들의 역작을 능가하는 예술의 최고봉으로 평가했다.

 

초기생애와 작품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47536일 피렌체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소규모의 은행 업무를 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현상유지에 실패하고 이따금 나라일을 맡아볼 뿐이었는데,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카프레세라는 작은 마을의 관리였다. 그러나 곧 가족들은 피렌체로 다시 돌아와 영구 정착했다. 미켈란젤로는 아마도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내고 난 듯한 13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도제살이를 시작했다. 피렌체에서 가장 이름난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밑에서 3년간 견습을 하기 위해 그의 공방에 들어갔으나 1년이 지난 뒤 콘비디의 저술에 따르면 더이상 배울 것이 없어 그곳을 떠났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기를란다요와 그 이전의 피렌체 거장들인 조토와 마사초가 그린 인물화를 묘사한 것과 몇 점의 소묘가 남아 있다. 확실히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로렌초는 주변에 시인과 지식인들을 불러들였으며, 미켈란젤로도 그 무리에 끼었다. 더 중요한 점은 그가 메디치가()의 소장품들을 접하게 된 것인데, 소장품들은 주로 고대 로마 조상(彫像)들의 단편이었다. 이 시기에 메디치가의 친구이자 가문의 소장품들을 담당하고 있던 청동조각가 베르톨도는 거의 미켈란젤로의 조각선생에 해당되는 사람이었으나, 미켈란젤로는 재료라든가 조각방식에서 그를 따르지는 않았다. 초기에 제작된 2점의 대리석 작품 가운데 하나는 베를톨도도 청동으로 비슷한 것을 제작한 바 있는 고대 로마 석관의 변형작인 켄타우로스들의 전쟁 Battle of Centaurs(1492)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몸짓과 힘은 미켈란젤로가 이후에 갖게 되는 관심을 뚜렷이 예고해준다.

 

이당시 피렌체는 유럽에서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으나 이전보다 큰 주문을 얻기가 힘들어져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피렌체 출신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1494년 미켈란젤로도 메디치가가 몰락하고 정치적 혼란기가 종식되기 이전에 피렌체를 떠났다. 볼로냐로 간 그는 성 도미니쿠스의 묘소를완성하기 위해 작은 조상들을 조각했다(1494~95). 3개의 대리석 조상들은 독창적이고 표현력이 강하며 응축된 형태표현으로 작품에 진지함을 부여했는데, 이는 그가 고대 및 조토에서 이어지는 피렌체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재료의 선택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대리석 덩어리의 단순함을 살린 것이 그의 예술의 특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 특성들이 몇몇 예외적인 작품에서는 무시되거나 수정되기도 했는데, 그 예가 바코스 Bacchus(1496~97)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의 나체상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훨씬 더 유동적이고 윤곽이 복잡하다. 일부러 불안정한 구도를 취함으로써 바코스 축제의 분위기를 묘하게 자아내는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정면보다는 사방에서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바코스덕분에 지금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Pietà를 주문받게 된다(1498). 이 작품의 제작에서는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에서 두 인물을 조각해내는 것이 복잡한 문제였는데, 그는 두 인물을 이전처럼 하나의 응축된 덩어리로 처리하여 인상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그러나 두 인물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 수직과 수평, 옷을 입고 있는 모습과 나체상, 죽은 자와 산 자 등 대조적인 많은 요소들을 강조했다. 이 작품으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으며 곧 피렌체 대성당을 위해 다비드 David를 제작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1501). 이 거대한 조상을 위해 그는 약 40년 전에 미완성인 채로 버려두었던 대리석 덩어리를 다시 사용했다. 거대한 규모에 걸맞는 단순화된 기하학 양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불균형한 포즈로 유기적인 생명체를 넌지시 강조하고 있는 모델링은 고대 조각방식에 가깝다. 이것은 완벽한 인간성이라는 르네상스 정신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여겨져오고 있다. 그무렵(1501~04)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 상을 여러 점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작은 조상 1, 원형 부조 2점 및 그의 유일한 이젤화도 있다. 조상인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는 부동적인 반면에, 이젤화인 성가족 Holy Family과 부조 성 요한네스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 with the Infant St.John는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형태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에 매료된 일면을 드러내고 있는데, 미켈란젤로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1500, 거의 20년 만에 피렌체로 돌아온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미켈란젤로도 당시 다른 젊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보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에 가장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듯하며, 미켈란젤로는 순간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능력과 무게나 힘을 보여주는 자신의 능력을 통합할 수 있었다. 그결과 미켈란젤로 특유의 힘찬 동작을 취하고 있는 육중한 몸의 이미지가 창조되었다.

 

중기

 

1504다비드가 성공한 후, 미켈란젤로에게는 거의 거대한 주문들만 들어왔다. 그는 이런 야심만만한 일들에 마음이 끌렸을 뿐 아니라 조수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들은 대부분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1504년 그는 피렌체 시청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데 동의했는데,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막 시작한 또다른 벽화와 1쌍을 이루게 되어 있었다. 두 벽화 모두 피렌체의 군사적 승리들을 다룬 것이었지만, 각각은 그 도시가 가장 자랑하는 예술가들의 특이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복사본과 부분적인 예비 습작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대성당에 12사도들의 대리석상을 계획하고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단지 하나 성 마태오 St. Matthew만을 손댔을 뿐이다. 이 작품에 표현된 인물의 동작에서는 처음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흐르는 듯한 유기적인 움직임과 미켈란젤로 자신의 위풍당당한 힘이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다. 이 조각은 또한 훗날 관람객들을 사로잡게 되는 그의 미완성작들 가운데 첫 작품이다. 그가 조각한 인물들은 마치 돌의 내부로부터 밖으로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미완성 상태가 고의적인 것임을 암시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모든 조상들을 완성하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인물들이 내재해 있음직한 돌덩이로부터 완전한 인물을 끄집어내는 조각가의 고충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에 관한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시간의 부족이나 다른 이유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작품들은 미완성임에도 그가 창조과정에서 절감했던 긴장을 반영한다.

 

1505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40개의 거대한 조상들로 장식하는 묘소를 주문했으나, 성베드로 대성당의 새 건물과 그의 군사작전 같은 다른 계획들 때문에 비용문제로 상당히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는 로마를 떠났으나 교황은 피렌체 시 당국에 압력을 넣어 그를 다시 불러들인 후, 그에게 비용이 다소 적게 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1508~12)를 맡겼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새 교황의 선출 및 취임식 등 커다란 행사를 위해 사용되며, 바티칸에서 주요한 신성구역으로서 역대 교황들에게는 커다란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이름난 벽화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미켈란젤로는 12사도를 주제로 천장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2명의 예언자들을 천장의 가장자리에 배치하고, 기다란 둥근 면의 중앙부분을 창세기에서 따온 9개의 장면으로 채웠다. 이 가운데 세 장면은 천지창조를, 셋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나머지 셋은 노아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 거대한 계획은 채 4년도 안 걸려 완성되었다.

 

이 천장화는 정문 위에 위치한 노아의 장면부터 시작해서 제단 쪽으로 갈수록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가면서 제작되었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재료로 그처럼 원대한 작품에 착수하게 되었으므로, 처음에 그린 인물과 장면들에서는 피에타와 같은 작품에서 사용했던 구상을 다시 사용했다. 이 시기의 인물들은 다소 정적이며 장면도 약간 작은 규모로 되어 있다. 일을 진행하면서 그는 곧 자신이 생겼다. 그는 점점 더 빨리 작업했으며, 동시에 인물들의 자유스럽고 복잡한 움직임 및 그들의 복잡한 표현과 더불어 더욱 더 대담해졌다. 인물들의 모습에는 항상 인상적이면서도 위풍당당한 가운데 긴장과 슬픔이 내재하게 되었다. 이는 선지자 에제키엘과 같은 인물에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엄청난 힘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이같은 모습은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인간성의 제시이다. 에제키엘 근처에 그린 이브의 창조장면에서 하느님과 아담은 그들의 위엄에 비해 너무 작은 공간에 압축되어 있다. 이러한 긴장은 마니에리스모에 속하는 폰토르모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조화에 대한 르네상스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조짐의 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아담의 창조 같은 차분하면서도 거대하고 조화로운 장면으로부터 예언자 요나의 신랄하고 뒤틀린 억눌림의 장면의 방향으로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뒤에 제작된 부분들에 이전의 순수한 육체적 양감을 좀더 명상적으로 절제함으로써 더 큰 내적 표현력을 보여준다.

 

천장화가 완성되자마자 미켈란젤로는 그가 선호했던 교황 율리우스의 묘소 작업에 다시 착수했다. 1513~15년경에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예언자들과 흡사한 모세상 Moses을 조각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육중함을 손상하지 않고 세부묘사를 더 풍부하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갇혀 있는 노예를 다룬 2점의 조각을 제작했는데, 이것은 묘소를 장식할 조각의 일부였으나 묘소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 조각들 역시 천장화에 삽입한 나체의 청년상들처럼 변화무쌍한 인물 유형을 돌에 새긴 것이다. 강렬한 느낌을 나타내는 그들의 복잡한 자세는 르네상스 시기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1506년에 발견되어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라오콘 Laocoön군상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 작품들에서만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라오콘군상은 분명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영향을 주었으나, 그는 필요한 때에만 헬레니즘 시대의 뒤틀림과 복잡함을 사용했을 뿐이며 라오콘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그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성 마태오(1505)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자 그의 묘소 제작을 위한 자금이 대부분 삭감되었다. 그의 후계자이자 소년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레오 10세는 그를 피렌체로 불러들여 메디치가의 영광을 과시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저택의 개조 및 그 가문의 교구에 있는 산로렌초 교회의 개조를 위한 건축설계를 하게 되었다. 산로렌초 교회의 거대한 개조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그 교회에 딸린 메디치가의 묘소를 짓게 되었다 (색인 : 메디치 예배당).

 

이 일은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을 따라 줄리아노와 로렌초라고 각각 이름 지어진 메디치가의 젊은 두 후계자들이 1516, 1519년에 죽은 것과 관련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1527년까지 이 교회의 대리석 내부와 아주 독창적인 벽의 설계 및 무덤에 세울 조상들에 몰두했다. 그 결과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례적인 비례와 두께를 지닌 창문들과 코니스들 같은 건물의 세부에서 전통적 고전 형태의 건축을 제멋대로, 비이성적으로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방의 맞은편 벽에 있는 2개의 묘소 또한 매우 독창적인데, 석관의 덮개가 둥글 뿐 아니라 그 위에 남성상과 여성상이 놓여 있다. 미켈란젤로 자신의 말에 따르면 낮과 밤을 상징하는 우의적인 조각상들이 한 묘소에 놓여 있으며, 또다른 묘소에는 새벽과 황혼을 상징하는 우의적인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완성작들로 손꼽히는 이 우의적인 조각상들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순환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이르는 피할 길 없는 시간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거대한 Day황혼 Dusk은 그 거대한 위엄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온한 느낌을 준다. 두 여성상들( 새벽 Dawn· Night)은 키가 크고 늘씬하며 당시의 미적 취향대로 작은 발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 외에는 매우 대조적인데, 처녀상인 새벽은 마치 생명을 얻으려는 듯 자신의 곡선을 따라 위로 쭉 뻗치고 있고 잠들어 있는 은 긴장된 꿈을 암시하는 듯한 자세이다.

 

바로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산로렌초 교회의 또다른 부속건물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설계했는데, 이는 교황 레오가 물려준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 도서관을 위한 설계는 기존의 다른 건물들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2층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은 현관 홀로 사용되었고, 새로 지은 3층에 있는 더 큰 도서실로 이르는 층계가 설계되었다. 리체토로 알려진 계단 홀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독창적인 벽이 설계되었다. 전통적인 건물의 구성요소들을 대담하고 자유롭게 재배치하면서, 심지어 기둥들을 대개 벽면 앞에 두는 관례를 깨고 그 뒤로 들어가게 했다. 이러한 건축설계는 마니에리스모 건축양식 중 최초의 중요한 예로 자주 인용되어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다란 도서실은 가지런히 정돈된 책상들의 전통적인 배열과 바닥이나 천장의 세부 장식 등이 훨씬 절제된 느낌을 준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특별한 경우에는 그의 설계 방식을 수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좀더 평온하고 조용한 효과에 맞추었다. 바로 그 이유로 이것은 그의 작품연구에서 간과되곤 했다.

 

1527년 로마가 정복당하고 레오 10세의 사촌으로 그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가 수치스럽게 도망가자, 피렌체는 메디치가에 항거하여 전통적인 공화국을 재건했다. 이는 곧 포위당해 패배했고 1530년에 메디치가의 통치가 재개되었다. 1530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가족묘소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특정한 정부형태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식으로 피렌체 시에 정치적으로 더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당시에 별도로 주문받은 2점의 조각으로는 새로운 정치 권력자에게 바치는 선물로 사용된 아폴론 Apollon혹은 다비드(정확한 주제에 대해 논란이 많음)와 패배한 적의 한 노인을 짓밟고 있는 조상인 승리 Victory가 있다. 승리에서는 정복자와 패배자 모두 매우 복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패배자는 한 귀퉁이에 쑤셔넣은 것 같고 정복자는 아폴론처럼 유연한 나선형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조각은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추구한 젊은 조각가들의 애호를 받아 수많은 우의적인 주제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1534년에 미켈란젤로는 마지막으로 피렌체를 떠나게 되지만 주문작을 끝마치는 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을 로마에서 보내며 때때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작품을 주문받아 작업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작업을 했다. 이때부터 피렌체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가 보존되었다. 1531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무렵에 사랑하던 형도 죽자, 그는 나이와 죽음에 대해 점점 더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무렵 거의 60세가 다 된 이 노예술가는 젊은이들에게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편지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주로 그 상대는 나중에 로마의 도시사업에서 활약하는 귀족 출신의 재능있는 톰마소 카발리에리였다. 이 시기 이후로는 그가 쓴 시도 많이 보존되어 있다. 그는 분명 당시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방법이었던 일종의 우아한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짧은 시들을 쓰기 시작했으나, 그것들을 보다 독창적·표현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1행이나 2행짜리는 제외하고 300여 편의 시들 가운데 75편의 완성된 소네트와 약 95편의 완성된 서정 단시가 있는데, 서정 단시란 길이가 소네트와 비슷하나 덜 형식적인 구조로 된 시를 말한다. 1545년경까지 씌어진 시들의 주제는 페트라르카의 연애시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 철학은 그가 소년시절 로렌초 데 메디치의 궁정에서 받아들인 신플라톤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시들은 인간이 신성으로 비상하려고 어려운 노력을 할 때 사랑이 도와준다고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1534년 미켈란젤로는 새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주문을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 끝벽에 거대한 프레스코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을 그리게 되었다. 이 주제는 중세 1500년경 이탈리아 교회들의 끝벽에 즐겨 그려졌으나, 그 이후로는 유행되지 않았다. 이렇게 독실한 전통의 부활은 당시 파울루스 3세 때 행해진 반()종교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던 25년 전과는 현저하게 다른 회화양식을 채택하고 있다. 짙은 하늘색 바탕에 사람들은 갈색조로 채색된 단순한 색채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벽화에서, 인물들은 활기가 결여되어 있고 그들의 형태는 몸통이 허리선도 없이 단순한 덩어리로 묘사되어 있다. 윗부분의 가운데에는 예수가 재판관으로서 그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한 팔을 치켜들고 있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다른 팔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구원받은 영혼들은 두터운 대기를 통과해 서서히 올라가고 저주받은 영혼들은 밑으로 가라앉는다. 밑에서는 해골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중세 미술에서 그대로 따온 주제이다. 오른쪽으로는 나룻배 사공이 영혼들을 저승의 강 건너편으로 나르고 있다. 이것은 단테가 그의 신곡 Divine Comedy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상해낸 이교적인 주제이며, 미켈란젤로가 극적인 느낌을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기량에 감탄한 바 있는 움브리아 출신의 시뇨렐리가 1500년경에 그린 그림에 소개되었다.

 

말기

 

말년에 미켈란젤로는 조각보다는, 회화와 시를 비롯해서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축에 더 많이 관여했다. 그는 후에 건축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지임을 선언하게 되는 새로운 현대 로마를 위한 기념사업을 맡게 되었다. 이 가운데 캄피돌리오 광장과 성베드로 대성당의 둥근 지붕은 아직도 로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그는 이 둘을 모두 직접 완성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죽은 후에 그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광장의 한 면에 있는 구청사를 개조했고, 그 양쪽면으로 똑같은 모양의 건물들을 설계했다. 그는 이 건물들의 주된 모티브로 훨씬 작은 1층짜리 기둥들과 2층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거대한 기둥들을 나란히 배열하여 풍부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건물 정면을 창조했다. 또한 이 두 건물 사이의 광장을 위해 바닥 설계도 했는데, 광장 중앙에 있는 조상(고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에 맞춘 타원형 구도의 이 바닥은 거대한 방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광장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직4각형이 아니라 시청 쪽으로 더 넓고 반대편으로는 더 좁은 형태로 되어 있다. 반대편의 열린 쪽이 시민들을 위한 출입구이며 긴 계단으로 되어 있다. 방문객은 왼편과 오른편에 있는 두 건물의 정면들이 출구로부터 들어갈수록 서로 더 멀리 떨어져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벽이 멀어질수록 서로 더 가까워 보이게 되는 원근법의 경향을 거슬러서 널리 펼쳐지는 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둥근 지붕은 로마의 지배적 권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보면 시각적 초점 역할도 한다. 그 지붕은 100년 전에 건물 내부를 덮는 목적보다는 그 외부의 효과를 주로 노린 최초의 거대한 돔형 지붕이었던 피렌체 대성당에서 유래한 것이긴 하나 미켈란젤로에 의해 이런 전환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생전에 그는 성베드로 대성당 작업을 하면서 특히 지붕 아랫 부분에 주력했다. 그는 앞서 그 대성당에서 일했던 건축가들의 건축개념을 버렸지만, 독창적인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개념만은 인정했다. 그는 좀더 최근의 설계에 따른 전통적인 라틴 십자가 형태의 평면도 대신 사방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형태의 이전 설계도로 되돌아갔으며, 세부사항에서 브라만테의 내부 장식을 수정하여 훨씬 더 통일된 공간을 창조했다. 그의 실제 건축작업은 대부분 제단 뒤의 둥근 벽에서 이루어졌는데, 거기에다 캄피돌리오 광장 건물들에서 이미 보여준 크고 작은 기둥들간의 대조를 삽입했다. 둥근 벽면에 부착된 이 벽기둥들은 벽의 방향이 계속해서 바뀜에 따라 힘차게 위로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주며, 고르게 힘찬 수평적인 리듬을 자아내기도 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박동하는 역동적인 건물을 만들어낸다. 미켈란젤로는 돔형 지붕의 기저 둘레에 원주가 세워진 통로를 만들어놓았다. 원주들의 꼭대기는 들보로 돔에 연결되어 있으나 원주들 사이의 지붕은 처리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 원주들은 돔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육중한 힘을 떠받치면서 고딕 양식의 건축들에서 볼 수 있는 플라잉 버트레스의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 열주의 형식은 고전적인 것이며, 그것들로 이루어진 수평면은 둥근 지붕과 그 아래의 수평적인 건물 구조 사이에서 야기되는 시각적인 전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성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일하면서 로마에서 많은 소규모 건축계획을 맡았다.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사저였던 파르네세 궁의 주요부분을 완성했는데, 꼭대기 층의 벽은 그가 지휘해 드물게 완성된 건축 부분에 속한다. 그밖에도 도시의 관문인 포르타 피아를 위한 설계와, 로마에 있는 피렌체 공동체 교회를 위한 설계와 같은 아주 상상력이 풍부하고 탁월한 설계도들이 이 시기의 것에 속한다.

 

그의 마지막 그림들은 바티칸에 있는 교황 파울루스 예배당의 벽화들인데, 이것들은 그의 이전 그림들에 가깝기보다는 그 시대의 다른 그림들과 더 유사한 방식으로 공간적인 깊이나 서술적인 드라마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다. 이 벽화들이 제작될 당시(1542~50), 티치아노가 로마를 방문했는데 그는 미켈란젤로가 칭송한 화가로서 당시 미켈란젤로의 색채에서 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가 쓴 말년의 시들은 주로 소네트였으며, 기도문과 같은 매우 직접적인 종교적 표현들이었다. 말년의 조각들로는 오직 2점이 있을 뿐인데, 둘 다 죽은 예수에 대한 애도를 주제로 그 자신을 위해 조각한 것으로 완성되지는 않았다. 좀더 큰 첫번째 조각은 자신의 묘를 위한 것이었으며, 애도하는 아리마테아의 요셉(또는 니고데모) ()은 자화상이다(미켈란젤로는 자기 작품에서 자신을 죄인 혹은 참회자로 묘사하곤 했는데, 최후의 심판에서 순교한 성 바르톨로마이우스의 살갗이 벗겨진 얼굴 부분에서 역력히 나타남).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 점점 불만을 품게 되어 작업을 중단했다. 이는 그의 작품들에 줄곧 나타나는 '불완전'이란 주제에 의한 또다른 작품에 해당된다. 그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해 강렬한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자신의 작품 수준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평가와 영향

 

후세 사람들에게 미켈란젤로는 셰익스피어나 베토벤처럼 인간의 비극적인 경험을 가장 깊이있게 보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몇 안 되는 위대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한 큰 명성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이 후세 예술에 끼친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미켈란젤로에 의해 연상되는 거의 우주적으로 장엄한 독특한 표현 형태들이 모방을 어렵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일부 영향을 받아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런 식으로 작업했던 예술가로서 가장 재능이 있었던 예술가는 다니엘레 다 볼테라였다.

 

17세기에 미켈란젤로는 해부학적 소묘의 일인자로 여겨졌지만, 그의 예술의 보다 폭넓은 다른 요소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추구한 예술가들은 그의 벽화에서 나타나는 압축된 공간이나 그 이후에 승리에서 사용한 구불구불한 자세를 채택한 반면에, 19세기의 거장 오귀스트 로댕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대리석 덩어리의 효과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발전시켰다. 17세기 바로크의 거장들이 그를 가장 잘 참조한 것으로 보이나, 이는 실물 그대로의 유사성을 배척하기 위해 변형된 방식에서였다. 조각가 베르니니 다음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가장 잘 활용한 미술가로는 플랑드르의 화가인 루벤스를 손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