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아트

툴루즈 로트렉 - 저주받은 운명을 넘어서...

카르미나 2010. 6. 18. 18:35

 

 

                                                                                                                                                            <라 굴뤼, 1885>, 사진

 

 

 

 

 

 

                                                                                                             <라 굴뤼와 발랑텡,1895> 

 

 

 

 

 

                                                      <물렝 루즈의 도착한 라 굴뤼, 1892>

 

 

                                                                                                                    <카베레의 아리스티드 브뤼앙, 1892>

 

 

 

 

툴루즈 로트렉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 1864 à Albi1901 au château Malromé)


 

 

 

   13세기까지는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중의 하나였던 툴루즈 백작의 직계후손이다. 19세기까지는 특히 강력한 지방 제후집안의 경우 근친결혼이 행해졌다. 근친 교배가 열성 형질을 낳는다는 것은 의학계의 한 가설이다. 일본의 경우 지나치게 뻐드렁니가 많은데 이것도 섬나라인 탓에 제한된 교배가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로트렉의 부모도 사촌간의 결혼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인지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다. 로트렉이 장남이었으며 아래로 동생하나가 태어났으나 1년을 살지 못하고 죽었다. 부모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로트렉은 엄마와 함께 살았다. 경제적으로는 불편함이 없었으나 10살 되던 무렵 심한 병을 앓고 난 후 뼈가 약해지는 질병, 아마도 성장판이 멈춰버리는 병으로 152cm이상 자라지 않았다.

 

 

   1881년 파리의 바칼로레아에 떨어졌는데  고향인 툴루즈에서 9월 학기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장애로 인하여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했기에 아마도  더욱 예술에 심취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으로 아르누보와 포스터 분야에서 놀랄만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특히 19세기 말의 파리의 보헤미안적인 삶을 그렸으며 1890년대 중반 대중 잡지인 <르 리르(웃음)>의 삽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거주했던 파리의 “몽마르트의 영혼”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처럼 주로 이 동네의 삶을 그렸다. 물렝루즈와 파리 여타 지역의 카바레와 관련된 그림들이 많다. 특히 아리스티드 부뤼앙과 그가 자주 드나들었던 유곽- 아마도 여기서 성병에 걸렸을 것이다-과 연관된 그림도 있다. 그가 재현한 여인 중 유명해진 인물은 무희 잔느 아브릴, 가수인 이베트 기베르그리고 특히 굴뤼라는 별칭으로 유명해진, 캉캉춤의 창시자인,특이한 개성의 소유자, 루이즈 베베르가 있다. 그 외에도 때때로 그림 교습도 했는데, 자신의 뎃셍 모델중 한사람이자 아마도 정부였던 수잔느 발라동에게 많은 격려를 했다고 한다.

 

 


   성인으로서의  생애의 대부분을 알콜중독으로 지냈기 때문에 말년닌 37살 되던해 (말년이라고 해도 정상적인 경우를 생각한다면 아직 청년기임)에는 어머니의 영지인 말로메의 요양원에서 보내야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임종의 자리에 온 아버지에게 한 것이었다. 호사가들의 입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부끄러워해서 살아생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이제 쓰러진 사냥감을 눈 앞에 두고 (승리의) 환호만을 남겨놓았네요” 라는 뜻의 말을 남겼다. 의미도 심장하다. 비정상적인 운명과 삶으로 평생을 지내온 한 아들의 복잡한 심정을 유추하게 한다. 그런데 호사가들의 입방아는 진실이었던 것인가?  화가는 분명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 났는지는 모르지만 가정내에서는 소중한, 유일한 아들이었던 것인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로트렉의 아버진인 알퐁스 백작이 아들이 죽은 날, 어머니인 그러니까, 화가의 할머니인 가브리엘 툴루즈 로트렉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적혀있다. “ 1901년, 9월 9일, 말로메. 아 사랑하는 어머니, 얼마나 많은 슬픔인지. 신을 결국 우리의 결합을 축복하지 않았답니다. 그의 의도는 이루어졌지만 자연의 섭리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 했군요. 그토록이나 심성이 착해서 아버지에게는 평생 악의에 찬 말힌 마디조차 하지 못했던,  내 가련한 아들이 겪은 슬픈 고통이 마감되면 어머니를 뵈로 서둘러 가겠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알퐁스.”


   모든 것을 참아주더라도 로트렉은 천재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라는 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탁월한 관찰력과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여느 평범한 예술가들은 결코 갖추기 힘든 소양이었다. 관습과 격식을 파괴한 이유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그의 삶과 예술은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의 존재가 증명하는 인격은 신체적 장애를 넘어 그가 ‘역사의 하나’로 살아남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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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2017



 

                                                                                                       Dans le lit, le Baiser (1892), private collection



Le Baiser (1892)



                                                                                                                            La toilette, 1896

                        


이 3장의 화폭을 추가로 올렸는데


마지막 <화장 La toilette>를 해설할려고 했는데,, 졸려서 담으로 미뤄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