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아트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1818-19, 루브르

카르미나 2010. 2. 14. 20:16

 

 

 

 

 

역사, 시회적 배경,

 

 

   프랑스에서는 1816년 , 워털루 패배이후, 루이 18세가 복귀됨.

세네갈이 영국에 의해서 다시 프랑스령으로 결정되고  프랑스는 7월 17일,  소함대  메두사호를 파견한다.

 함장은 위그 드루와 쇼마레였다. 그는 소위 구 체제에 속하는 장교로서 줄타기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경험 미숙으로 함장과 장교 선원들 사이도 좋지 못했다. 모리타니아 앞 160Km지점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함. 좌초선의 부양은 쉽지 않았다. 메두사호는 과부하 상태였다.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웠던 것이다.

    메두사호는 간신이 다시 부양했으나 곧 심각하게 파괴되고 만다. 탈출은 쉽지 않았다. 함장 가족을 포함한 233명의 승객이 6개의 소형 보트와 린치(대형보트)에 옮겨 탔다. 17명의 선원들은 메두사호에 그대로 남았다. 이들 중 3명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나머지 149명의 선원과 병사는 전장 20M, 폭 7m 짜리 작은 구명뗏목에 식량도 거의 없이 탈출을 시도해야 했다. 그런데 다른 구명보트와 연결되어있던 줄이 끊어지자 (혹은 일부러 놓아버렸는지는 알 수 없슴) 함장은 각자의 운명에 맡기도록 포기해버린다. 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첫날 밤 20명이 자살하거나 살해된다. 12일이 지난 후 같이 출발했던 작은 범선 아귀스호가 뗏목을 발견했을 때는 15명이 살아 있었다. 아마도 인육을 먹고 버텼던 것 같았다. 이들 중 5명은 몇 일 후 숨졌다.

 

   함장인 쇼마레는 3 년 형을 받았다.

 

 

    1818-1819년 사이에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이 그림은 1824년 조례에 의해 국가가 화가의 친구인 데르도 도르시로부터 6.500,프랑에 구입했다.

 

 

 

분석

 

 

   주제 자체는 상당히 도발적인 선택이다. 사실적이며 거의 신문 기사로 다루는 대 사건과 차이가 없다.   실제로 메두사호 사건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 주제는 낭만주의적인 것으로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법에 있어서는 오히려 고전주의적이다. 육체의 표현이 거의 조각과 같은 열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곧 프랑스 사회가 지나가야할 정치적인 격동의 시기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제리코 자신이 겪게 되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예술적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억압적인 군주제도에 대한 일종의 항거인 것이다.

 

 

     화폭 전체 구조는 아무런 균형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불균형과 무질서를 강조하여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매우 강렬한 두 개의 직선 혹은 플랜이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뗏목이고 다른 하나는 배경으로써 멀리 드러나는 경치다. 불안정한 바다위에서 펼쳐진 피라미드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독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왼편 아래쪽에 있는 시체에서부터 오른 쪽 편의 구조선을 향해 손짓하기 위해 서있는 선원으로 이르는 ‘올라가는’ 직선을 따라갈 것이다. 재현된 동작들은 매우 논리적이다. 검증된 사실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뗏목을 타고 살아남은 15명은 결국 아귀스에호에 의해서 구출되었다. 그러므로 이 직선이 상승하는 의미는 비록 구름은 어둡고 짙었지만, 결국 난파자들의 겪은 절망으로부터 살아남았다는, 일종의 성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제2 열(플랜)에 보이는 광채도 이를 뒷받침 해준다. 이같은 상징성은 뗏목에 있는 자들의 동작과 제스쳐로도 다시 확인된다. 동작은 고전적이다. 서양인들의 논리에도 적합하다, 감상의 충위에서 서양인들은 일반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폭이 상징하는 것과는 반대로 구조선을 아주 조그맣게 그려넣었는데 이는 필시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색체와 밝기에 있어서는 이 그림에 사용된 색조는 매우 제한적이다. 전체적으로 베이지 색에서 검은 색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중간 단계로 옅은 갈색조에서 짙은 갈색을 거쳐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뜨겁다는 분위기를 풍기면사도 전체적으로 나름의 조화를 이루어 극적이며 어떤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화폭에 담긴 지배적인 색조는 베이지 색이며 전체적으로는 색조에 광택이 결핍되어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색조에도 예외가 있다면 그림의 왼편 하단 죽은 시체를 안고 있는 노인이 걸친 스톨라(성직자가 걸치는 어깨 숄)의 빨강색 색조이다.

 

 

 

    낭만주의 회화의 특징은 색조의 모호한 사용과 각 색조를 구분짓는 흐릿한 윤곽 내지는 경계이다. 이것이 물론 고 다가올 인상주의를 예고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 그림에서도 그 색체들의 경계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혹은 화가의 의도적인 작업의 결과일련지도 모른다. 더구나 원본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면 그나마 더 확실한 분석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복사본을 가지고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어렵다. 또 한가지 주목한다면 이 그림에서 화가는 긁는 수법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제리코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색조의 밝기는 전체적으로 역시 어둡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보다 밝은 색조를 드러내는 먄도 있는 데 제 2플랜, 즉 뗏목 뒤로 드러나는 경치 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대조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다, 왜냐면 두 층위 다 같은 색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의미적차원에서의 분석

 

 

 

     역사적 문맥은 앞서 언급한 것을 참조할 것이다. 제리코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이 사건이 사회적인 이슈가 한창일 때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표류하는 메두사의 뗏목이 겪은 고뇌를 표현하기 위해서 극적으로 그 비극을 마감하는 순간, 즉 생존자들이 보일 듯 말 듯한 아귀스 호를 발견한 순간을 그림으로 포착하고 있다. 작품은 실제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제리코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했던 예술적 긴장이 한창일 때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술을 질식시키려는 전제주의 체제에 대한 한 예술가의 의견 표명일 수도 있다.

 

 

    메두사의 생존자들은 한 시대, 즉 군주제의 한 이미지이며 동시에 이 그림은 시사문제와 감수성이 회화로 재현된 한 모델이기도 하다. 뗏목의 맨 가장자리에 서서 구조선을 향해 신호를 보내는 검은색으로 표현된 한 남자의 제스쳐는 그만큼 정치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화가는 아무튼 이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19년 살롱에 출품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낭만주의 회화를 예고했던 것이다.

 

                                                                                                                                               2010/02. 메모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