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배우, 미녀

마를렌느 디에트리히, 음울한 미녀

카르미나 2007. 2. 1. 02:12

 

 

 

1944년 서부 전선의 마를렌느  

 

 

 생가에 새겨진 플라크

 

 

 

    마를렌느 디에트리히

 

    1901년 12월 27일 독일의 베를린-쇤베르그에서 태어나 1992년 5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졸하다. 배우이자 가수이며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죽었다. 한 때는 유명한 영화인 조세프 폰 스텐베르그의 총애하는 뮤즈였다.

 

   프러시아 장교였던 아버지 루이스 에리히 오토 디에트리히는 막내인 마를렌느가 7살 되던 해 사망했으며 어머니 조세핀은 두 딸을 데리고 기병 장교와 재혼했다. 마를렌느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노래에 재능을 보였으나 손가락을 다쳐 바이올린을 포기해야 했다. 그 후론 톱 연주를 계속했다고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의 전장에서 의부가 사망하고 마를렌느는 1919-1921 년 간 바이마르의 기숙학생이 된다.

 

 

   1921년 맑스 라인하르트에게서 연극 수업을 받은 후 1922년부터 단역으로 연극에 출연하기도 하다 영화에도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조 메이의 “사랑의 비극”에서의 루시 역으로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다. 1923년 루돌프 시버와 결혼하여 이듬 해 딸 마리 엘리자베스를 얻는다. 마침내 1928년 최초의 노래 "Es liegt in der Luft"를 녹음한다. 1929년 <비밀>에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것이 조셉 폰 스턴버그의 주의를 끌었다. 스턴버그는 그녀를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사가 만든 그레타 가르보의 신화에 관한 여배우를 찾고 있던 파라마운트사의 베를린 사무소에 소개한다. 1930년 앞서 말한 조세프 폰 스텐베르그의 <푸른 천사>와 로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어로는"나는 오직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로 번역되었다) 라는 노래로 유명해진다. 베벨스버그의 우파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임마뉴엘 라스 교수역의 에밀 제닝스와 로라로라역의 마를렌느가 출연했는데 독일 영화를 말할 때 맨 처음 언급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거의 무명이었던 엷은 블론드 머리의 마를렌느는 차가우면서도 마술적인 매력을 지닌 스타로 탈바끔한다. 1930년 4월 1일의 최초의 글로리아 팔라스트(현 베를린 영화제의 전신이라 할 수 있음)의 밤, 마를레느는 기다란 하얀색 모피 외투를 걸치고 팔에는 장미 다발을 들고 그때까지는 어떤 여자도 그렇게 한 적이 없는 제비꽃 다발을 드레스에 꽂은 채 등장해 이목을 집중했다. 그날 밤 23시에 그녀는 레흐터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브레이머하반으로 가서 뉴욕행 배를 탄다. 미국에서 <모로코>를 찍기 위해서였다. 이 영화는 오스카 상에 노미네니터 되기도 한다.

 

   1937년 나치를 피해서 미국 시민이 된다. 열렬한 반 나치주의자로서 미국 군인들과 영국 군인들,프랑스 해방기간 중에는 프랑스에서 병영을 위문한다. 이 때의 유명한 <릴리 마를렌>(1941)은 독일의 전 막사에서도 애창곡 순위 1위였다고 한다. 파리가 해방되자 연인이었던 장 가방과 해우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그녀의 경력 중 가장 하락기를 경험한다. 히치콕과 프리츠 랑의 몇몇 영화에 출연하나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1952년 장애인을 위한 갈라쇼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이것이 그녀가 라스베가스에서 자신의 스펙타클 카바레 공연을 진수하게 한다. 그 이후 다시 한번 전 세계적인 은막의 스타와 가수로 부활하여 1960년 유럽, 이그라엘, 미국 그리고 전 소비에트 연방에서 까지 공연을 한다.

 

 

    이 영광을 안고 1960년 모국으로 귀환했으나 말이 많은 환영?을 받았다. 비스바덴에서는 한 소녀가 마를렌느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 마를렌느는 프레스르 통해서 “독일과 자기는 더 이상 같은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 는 말을 남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전한다.

 

   이후 1975년 오스트레일리아 공연의 실패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은막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후 파리의 몽테뉴 가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1992년 사망했다. 마지막 고별 미사는 오페라 근처의 마들렌느 성당에서 열렸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베를린 쇤느베르그의 프리드노 묘지에 안장되었다. 자기 어머니가 묻혀있는 묘지에서 가까운 곳이다. 유일한 혈육인 마리아 리바는 스위스 영화 감독과 결혼 했다. 사실상 그녀를 내쫒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베를린은 유족에게 사과하고 베를린 영화 박물관 근처의 푸츠다머 광장의 현대식 구역에 마를렌느 디에트리히 광장을 헌정한다.

 

 

    그녀는 1930녀 대와 40년대의 가장 섹시한 여배우로 간주돠었으며 미국인들은 그녀를 영화사의 전설로 기록 될 9번째 여배우로 꼽았다. 그녀는 외관상 홀쪽한 빰을 만들려고 그토록 두려워 한 어금니를 뽑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는 “분장사와 배우의 관계는 공범 관계와 유사하다”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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