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떨쳐버리기 위해서 여행한다.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서 무의식의 저쪽까지를 탐험할 필요가 있다" 라고 폴 모랑이 말한 바 있다. <보물섬>이나 <황야의 절규>, 혹은 기터 여러 작가들의 체험 소설 앞에서 한숨을 자아낸 어린 날의 기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로빈슨 크로소의 모험이나 갈리버 여행기 등등, 이들이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평범함을 벗어난 대담함을 이야기하고 범상치 않은 자유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추기는 것은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다른 관습과 야릇한 이상함, 있을 것 깉같지 않은 모험,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위험 등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와는 다른 "또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즐거움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바로 이것들이 육체적 고행을 통한 이동이라는 인간의 특이한 오디세이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세계의 최고의 것들을 여기가 아닌 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이상주의자들이며 동시에 영원한 몽상가인 셈이다.
"무고한 자들만이 사물이란 불가능한 것이란 점을 모르면서도 실제로는 그 사물들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들이다" 라는 마트 트웨인의 말은 부정하기 어려운 황홀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기도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 두려움을 글쓰기를 통하여 푸닥거리하면서 기어이 시도하려는 그들이기에 무모하고도 용감하다. 테오도르 모노는 사막에서 체류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곳은 의료시설이 전혀 갖추어지 있지 않은 곳이어서 말하자면 병들 권리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보고 경험하기 위해서 규칙을 깨뜨린다. 그런 당신에게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왜냐면 그 곳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곳에서 아파서 누어있거나 부상당하거나 어쩌면 죽어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다가올 일을 모른다. 저 먼 곳에 있는 오아시스를 가까이로 옮겨오지 못한다 해도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다."
또 1930년 대에 같은 사막에서 실종된 적이 있었던 오데트 뒤 피아구도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 꺼칠꺼칠하고 황량한 경치는 결코 우리의 불안을 경감해주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 같지는 않았다. 1개월에 걸쳐서 틴투프까지 걸어왔던 길에는 아무런 구조의 희망도 피난처도 없었다. 발목이 모래 속에 푹푹 빠질 때마다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과 연결된 마지막 매듭들이 하나 하나 풀에 헤쳐져 발가락 사이로 도망쳐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때야 말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여행에는 절대적 낭만주의와 관련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거나 시련을 부과하기도 한다. 여행가인 작가들은 자기를 상실하고 방황할 줄을 아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글쓰기를 통하여 그리고 그 글쓰기 안에서 자기르르 다시 찾을 줄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자크 카르티에의 숨결이 살아있는 것처럼 역시 랭보의 숨결도 숨어있는 것이다.
이들의 무모함이란 결국 자유를 갈구한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하면 소설과 시의 경계, 그리고 모든 지리적 지도의 경계 까지를 초월하여 감히 시도한다는 것이 다. 왜냐면 여행이란 글쓰기의 메타포이며,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진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 즉 육체적 시련을 글쓰기로 전환한다는 것인데, 이 글쓰기 에서는 비록 여행가와 소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자주 현실이 허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여행가인 작가들은 단순한 산책자가 아니라 글을 써야만 하는 필요성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한 편에는 여행자, 다른 한 편에는 작가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 절반과 여행자 절반이 합쳐져서 하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도가 이 절반씩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절반의 ‘나’라는 것이 결코 지평선을 가려버리지는 못한다. 만일 그가 작가로서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다면 그의 또 다른 절반은 지편선 건너 저 쪽을 방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이국의 풍경들이 그의 연대기를 구성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텍스트는 이것이 자기 수련의 경험이든 아니면 결함과 불충분함과 노쇠함을 동반한 자기 발견이든지 간에 하나의 보편성, 즉 미지를 경험한다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한 번 더 반복하자면, 여행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은 이 세상에서 하나의 설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신비적인 탐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이 이상적인 설자리라는 것은 결코 찾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행가인 작가들은 물론 그들이 실증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결코 집안에 머무는 성격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인류 최초의 원초적 유랑의 본능이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잠재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모노같은 이들은 늙거나 병들어 있으면서도 결코 사막의 부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스티븐슨을 생각해 보자. 습진에 걸려 병들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산에 텐트를 치고 아영을 즐겼으며 잭 런던은 19세기 말의 모험가들의 서사시를 위해서 알라스카의 금 채굴꾼들의 틈에 끼어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었다.
이들은 모두 오직 인간만이 사물의 척도가 아니란 점을 알았다. 현실에 숨어있는 낭만적 차원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로지 글쓰기라는 나침반에 의존하여 때로는 자신을 애무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목을 졸라매는 세상이라는 팔에 안겨 기꺼이 표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매일 매일의 일상이 답답하고 부조리하게 느껴지면 어찌할 것인가! 저항뿐이다 ! 그리고 이것이 이들에게는 움직이는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움직이는 것이다. 삶의 변덕스러움과 결핍을 가장 가까이서 느껴보기 위해서 문명이라는 푹신한 둥지를 떠나는 것, 지상의 거친 화강암의 감촉을 발자국 아래 느끼고 때로는 침묵이라는 예리한 칼날을 느껴보는 것. 이런 것들이 여행가인 작가들이 기대한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이른바 편력의 작가들을 현실이라는 조그마한 새장에 가두어 둘 수 없다. 너무 비좁아서 숨 막혀 죽어버릴 것이다. 그들에게는 바깥 세상이 곧 치료약인 것이다.
메모시아, <여행이야기>, 에필로그 중에서.
'낙서04-여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고대의 선구자들 (0) | 2006.04.02 |
---|---|
여행론.프로로그 (0) | 200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