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인, 열전

아폴리네르 G. Apollinaire, 미라보 다리 Le Pont Mirabeau

카르미나 2007. 10. 3. 19:28

Le Pont Mirabeau     /de 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기억해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며

우리들의 팔이 만든 다리 아래로

영원한 시선의

나른한 물결이 흐른다

.....

......

사랑은 가고 물결도 흘러 간다

사랑은 가고

인생은 얼마나 느린가

희망은 얼마나 잔인한가

 

날이 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가버린 시간도

가버린 사랑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른다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Et nos amours

Faut-il qu'il m'en souvienne

La joie venait toujours après la pein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Les mains dans les mains restons face à face

Tandis que sous

Le pont de nos bras passe

Des éternels regards l'onde si lass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L'amour s'en va comme cette eau courante

L'amour s'en va

Comme la vie est lente

Et comme l'Espérance est violent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Passent les jours et passent les semaines

Ni temps passé

Ni les amours reviennent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Alcools (1912)

 

 

   시를 제작하는 기법과 그 기법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라는 점에서는 프랑스 현대시의 시조라고도 일컬어지는 기욤므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가 쓴 이미 잘 알려진 「미라보 다리」이다. 본명이 빌헤름 아폴리나리스 드 코스트로비츠키인 아폴리네르는 로마 출생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퇴역 장교인 아버지와 폴란드 귀족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향락적이고 도박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따라 남 프랑스의 칸느, 니스 등지를 옮겨 다니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이 때 많은 독서를 했으며 이것이 그의 폭 넓은 교양을 설명해준다. 학교를 마친 후 파리로 올라가 말단 은행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한 때는 부유한 독일 가정에 가정교사로 초빙되어 독일에 거주하기도 했다. 그 시절 독일에 가정부로 와있던 애니라는 영국 처녀를 만나 얼마 안 되어 실연하게 된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신문 기사를 쓰거나 잡지 등에 주로 에로틱한 글을 기고하여 생활하면서 앙드레 살몽, 맑스 자콥 등과 함께 문인지를 펴내기도 하고 블라크, 피카소, 블라맹크 등 소위 전위파 화가들과 어울렸다. 그의 풍부한 상식과 교양, 그리고 특히 구김이 없고 거침이 없는 그의 성격이 그로 하여금 전위파 예술 운동에서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새로운 유파나 조류가 나올 때마다 그는 선두에 서서 이론가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했다. “초현실주의” 라는 용어도 실은 그가 1917년 극작품, 「테레지아의 젓가슴」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었다.

1913년 33세 되던 해 첫 시집 『알콜』이 출판되어 주목을 받는다. 세계 1차 대전을 앞 둔 무겁고 음울하고 불안한 당시의 사회에 조금은 거칠게도 느껴지지만 전통에 대한 파격과 반항을 통한 새로운 시도는 거의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조한다. 파격적이고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감미롭고 우수에 찬 감상에서 오는 감동을 기이한 영상과 부드러운 음악과 같은 운율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다. 문학사적 관점에서는 위고와 보들레르, 베를렌느에 이어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잇는 교차점에 위치한다. 무엇보다 언제나 새로운 혁신을 구하는 그의 성향은 두 번째 시집 『칼리그람므』에서는 보다 파격적인 표현방법을 시도한다- 이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디지털 미학에서 반드시 재 검토해 볼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방대한 주제의 시작이 될 것이므로 일단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의 일생 자체는 호방하고 화려한 인상과는 달리 슬프고 너무나 짧았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 인이 아님에도 “나는 프랑스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은 최소의 봉사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장에 자원 출전한다. 1916년 포탄의 파편으로 머리에 부상을 입어 두 번이나 뇌수술을 받았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1918년 ‘아름다운 빨간 머리“ 로 알려진 한 젊은 부인의 팔에 안겨 서른 아홉의 생을 마감한다. 신은 자유분방한 천재에게 장수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 시에는 역시 사연이 있다. 지지난 세기 초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무대였다. 아폴리네르 역시 이곳에 드나들며 많은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28세 되던 해인 1907년, 친구인 피카소에 그에게 마리 로랑셍이라는 처녀를 소개시켜주었다. 부유한 부르즈와 출신이었고 지적이었으며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25살의 마리와 아폴리네르는 곧 서로 사랑하게 된다. 마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불로뉴 숲 근처인 오퇴이유로 이사를 한 것으로 보아 특히 아폴리네르가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는 5년을 지속하나, 그 이후 결국 마리가 떠남으로서 이 관계는 마감된다. 아마도 성격 차이 였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가 세련된 부르즈와였던 반면, 기욤므는 질투도 많았고 화도 잘 내었으며, 특히 불안정하고 변덕스럽고 다분한 바람기가 마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바람기 많고 변덕스러운 성격이었지만 이 절연은 이 시에서 확인 하는 바와 같이, 기욤므에게는 가슴아픈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미라보 다리는 아폴리네르의 작업실과 거주지가 있던 몽마르트언덕에서 바로 이 미라보 다리를 건너서 마리의 집이 있는 오퇴이유로 가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다리는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고 그리고 또 두 사람을 서로 헤어지게 하는 상징물인 셈이다.

  

     전체적로 이 시는 용어와 음성적 가치, 그리고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 서로 상응하는 구조 속라는 전통적인 특성을 지키면서도 매우 독창적이다. 오직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작가의 스라린 고통만이 남는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                                   카르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