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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세 Alfred de Musset 01-슬픔 Tristesse,

카르미나 2007. 10. 2. 16:54

 

  

Alfred de Musset (1810-1857)

 

 

    알프레드 드 뮈세는 파리의 라틴구역 근처의 교양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시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이미 저명한 에세이스트로서 루소의 전문가로서 루소의 작품들을 편집 출판한 적이 있였다. 어머니는 교양있고 다정 다감한 분이었다고 한다. 뮈세가 태아났을 때 형인 폴은 이미 여섯 살 이었다. 7살 때 앙리 4세 학교(최고의 명문임)에 입학했으며, 1827년 라틴어 논술 시험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빅토르 위고의 처남인 폴 푸세로 인해 17세부터 낭만주의 옹호모임인 세나클인 사를르 노디에의 살롱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셍트-뵈브, 비니와 교우하였으나 당시의 대가, 위고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성격상으로는 모자랄거 하나 없고 교양있는 가문의 부잣집의 아들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변덕이 심했으며 예민했으며 충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변덕에는 훙;f 그의 전기를 편집한 형조차 눈감아 줄 정도 였다고 한다.

 

   게다가 뮈세는 말하자면 재능까지도 타고난 것이었으니 귀염을 받을 만 했다. 앙리 4세 학교의 학생이었으며- 동료 중에는 오를레앙 공(왕족)의 아이들도 잇었다- 학업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촉망되는 장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미래가 되었을까? 의학과 법학, 음악 미술까지를 차례로 거친 후에야 그의 미래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다. 변덕 때문이리라. 20살 되던 해에 그는 이미 파리의 댄디로 어느 정도의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낭만주의의 멋지고 매력적인 귀여운 귀공자’ 라는 호칭이 이미 전혀 낮선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멋진 귀공자에게도 생의 굴곡은 피해가지 않는 법이다.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이 ‘세기아’는 인생의 여러 길 가운데 결국 생을 맛보고 즐기기 위해서 시를 선택하는 데, 아직 23세가 채 되기 전인, 그러니까 1833년 30세의 풍만한 육체의 정열적인 부인으로 집에서 뛰쳐나와 소설가가 된 조르즈 상드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곧 열열한 사랑에 빠져 파리 근교의 퐁텐느불로우 등에서 ‘아름다운’ 밀월 도피 여행을 하다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도착한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앓아 누운 상드를 간호하다가 뮈세는 뇌막염에 걸려 생사를 헤매게 된다. 이번에는 상드가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나 그녀는 이 동안 뮈세의 주치의였던 이탈리라인 파젤로라는 걺은 의사와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된다. 절망과 질투에 빠진 뮈세는 병을 안고 귀국, 그 후 4개월 동안은 온종일 방에 들어 앉아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하려는 노력도 있었고 또 얼마 동안의 다시 정열을 불태운 적도 있었으나 결국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이 사랑과 갈등에 대해서는 뮈세는 상드에게 바친 “세기아의 고백” 이라는 책에서 그 내막을 폭로했고 상드는 상드대로 “그 여자와 그 남자” 라는 책을 써서 자신을 옹호했다. 1835녀부터 1837에 이르는 동안 뮈세는 그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4개의 ‘밤’을 썼다(5,8,10,12월).그러나 이 조숙한 천재는 지나친 심적 병약함 때문인지 이유는 알수 없지만 30세가 되기 전에 시적 상상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한 채로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간다.

 

   1845년 발작과 더불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 수여되고 1852년 두 차례의 탈락을 격은 후에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로 추서된다. 그 외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사관장에 임명되는 등의 서사를 격 운 후에 1857년 길지 않은 생애를 마감한다.

여기 올려보는 글은 산문, ‘사랑을 가지고 농담하지는 않는다...’(1934)와 ‘슬픔’ (1840) 이다

 

 

 

    "[..] 그렇다 해도 이 세상에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 것은 너무나 불완전하고도 무서운 두 존재의 결합이다. 때로는 사랑에 있어서 속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받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불행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만일 무덤을 눈앞에 두고 뒤를 되돌아 보면서 스스로에게 말한다면, 나는 충분히 고통 받았고 때로는 속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했었다 라고 할 것이다. 인생을 살아온 것은 내 자신이지, 내 자만심과 권태가 꾸며낸 가공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

                                                              사랑을 가지고 농담하지는 않는다On ne badine pas avec l'amour, 1834

 

 

2.

슬픔

 

 

나는 나의 힘과 삶,

친구와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나의 천재성을 믿게하는

자만심 까지도 잃어버렸다.

 

내가 진리를 알았을 때,

그것이 친구라 믿었었다,

내가 진리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을 때,

나는 벌써 그것이 진저리 났다.

 

하지만 진리는 영원하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셈이다.

 

신은 말한다. 그에게 답해야 한다고,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재산은

가끔 울었다는 것 뿐이다.

 

Tristesse

 

J'ai perdu ma force et ma vie,

Et mes amis et ma gaieté;

J'ai perdu jusqu'à la fierté

Qui faisait croire à mon génie.

 

Quand j'ai connu la Vérité,

J'ai cru que c'était une amie ;

Quand je l'ai comprise et sentie,

J'en étais déjà dégoûté.

 

Et pourtant elle est éternelle,

Et ceux qui se sont passés d'elle

Ici-bas ont tout ignoré.

 

Dieu parle, il faut qu'on lui réponde.

Le seul bien qui me reste au monde

Est d'avoir quelquefois pleuré.

                                     Poésies Nouvelles, 1840

 

 

   이 시는 프랑스에서는 거의 뮈세의 이미지 자체와도 동일시되는 시이다. 상드와의 연애 사건이 대부분의 뮈세의 생과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는 이로 부터는 한참 시간이 지난 1940년에 쓰인 것이다. 뮈세는 1938년 라셀이라는 비극배우에게 연정을 품은 바 있는데 당시 레셀은 19세에 불과 했다. 뮈세 역시 아직은 3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으니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라셀과는 39년 봄 짧은 관계를 맺는다고 나와 있지만 그 후로는 드러난 바가 없다. 1940년 뮈세에게는 건강상의 문제가 찾아온다. 이시는 아마 이 무렵의 감상인 것 같다.                                                                                           카르미나